워케이션에 진심인 편

원루프제주 워케이션을 다녀와서 - 2일차

데브마이너 2023. 3. 10. 12:11

사실 이 글에 앞서 원루프제주에서의 워케이션 일상을 하루하루 실시간으로 기록한 버전이 따로 있다. 시시각각 새롭게 경험하는 것들과 거기서 피어오르는 감정들에 대해 놓치고 싶지 않았고, 생각나는 것들을 정제되지 않은 내용으로 채워나갔다.  다만 그렇게 적고 나니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올리는데 주저함이 있었다. 그 내용을 품고 묵혀 뒤늦게 따라오는 자각까지 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작하는 오늘 2일 차의 내용을 작성하며, 그 당시에 작성했던 1일과 2일 차의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실시간의 가벼움과 당시의 즐겁고 설레는 기분이 깃들어있었다.

 

원루프의 가이드를 제대로 숙지 안한 상태에서 처음 원루프제주 숙소에 당도해 10여 분간 디지털 원격 보안문 앞에서 서성이며 '키링'을 설치해야 했던 상황부터 시작해,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챗봇과 씨름하던 순간들. 결국엔 배달기사님의 도움(?)을 받아 얼떨결에 들어선 건물의 계단과 복도를 마주하면서 사진으로만 보던 감성숙소가 이런 것이구나 느꼈던 장면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행착오와 그 시점의 생생한 기록을 통해 실용적인 정보를 온전하게 다른 워케이셔너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그땐 간절했지만, 그 속에서 놓치는 것이 있을까 싶어 공개하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2일 차를 다시 꺼내본다.

 


 

"포스트모템".  오늘 새벽에 2일차 글을 쓰기로 마음먹기 이전에 그냥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단어다. 이게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랐는데, 사실 원루프제주를 통한 워케이션을 다녀오고 나서 내가 품었던 워케이션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 워케이션은 참 소중한 단어인데, 그것이 소비되는 과정이 너무나 빠르다 보니까. 금방 식상해지고 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래전 웰빙이라는 단어가 신선하게 다가오고 소비되더니 이제는 상업적인 용도에서조차 식상해서 잘 쓰이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후로 힐링, 욜로, 플렉스, 파이어 등의 단어들이 있었고 그것이 지향하는 바나 의미는 조금씩 달랐지만 명멸의 과정은 대략 비슷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은 유행이 있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 패턴이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단어가 새로 생기고 나서 영글어가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은 좀 아쉬운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의 명멸이 결국 하나의 지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안타깝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그럼 워케이션은 무엇이 다르기에 나는 이토록 천착하는 것일까? 적어도 내가 보기엔 다른 신조어들과 달리 그 라이프사이클이 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름을 달리해서라도 존재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벌써부터 어딘가에선 워케이션 대신 리케이션이라고도 부르며, 확장된 의미를 투영시키기도 한다.(https://brunch.co.kr/@jejucenter/402)

 

제주 워케이션? 이제는 리케이션!

이호준 위니브 대표 |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각종 매체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말 중 하나가 바로 ‘뉴노멀 시대’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새로운 일상을 뜻한다. 우리 일상이 얼마나 변했길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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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내 특수한 상황에서 거는 기대일 수도 있겠고, 통용의 가능성을 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근래의 분위기는 좀 달라진 듯 하다. 며칠 전 부산형 워케이션 팸투어에서 변대표님의 리모트워크와 워케이션에 대한 강의를 접하며 기업에 소속된 근로자의 근무환경 변화 상과 트렌드를 정리했는데, 이제 상시 출근으로 회기 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고, 이를 성토하는 이야기가 들린다.

 

나는 상시 출근에서 자유롭지만 그 고민을 함께 하는 중이다. 결국은 일상에 충실하며 내가 스스로 입증해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하고, 주변의 많은 우군을 찾아 힘을 합쳐 워케이션을 지켜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유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여기에서도 통용된다고 생각한다. 워케이션에 임하는 자세는 진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깊이 되돌아본다.

 


2일 차.

 

아침.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날씨는 흐렸고, 상상했던 제주도의 화창하고 투명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기예보를 보니 앞으로도 주욱 흐릴 예정이란다. 금방 시들해진 바깥의 풍경에 대한 기대를 거두고 사진 한장 찍지 않고 내면 세계로 빠진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제주도에 와 있고, 혼자다.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오늘 하루를 잘 보낼 수 있으리'란 믿음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내가 달성하고자 하는 꿈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경제적 부에 우선 집중하리라 마음먹는다. 그리고 평소대로의 일상을 영위하겠다는 마음을 불끈 먹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 그런데 일어나서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내가 원래 아침부터 하던 루틴을 그대로 행할 수가 없음을 깨닫는다.

 

보통 나는 아침에 실내에서 나만의 운동으로 아침을 여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면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로 습관화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 운동은 요가 매트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에는 그런 것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물론, 비슷한 것을 찾아서 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밖에 나가서 조깅으로 대체해도 된다. 의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의지를 낸다는 것은 나름의 에너지를 쓴다는 것이고, 루틴은 그것을 하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다. 거기서부터 생각이 깊어졌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나마 지난 통영워케이션 때에서는 날이 좋아서, 아침에 밝은 햇살을 받으며 조깅으로 대신한 적도 있었지만, 여기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신발과 양말이 다 젖을 터였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만 하고 있는데, 어딘가로부터 부산한 생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작아서 들릴까 말까 했지만 콘센트에서 전원을 빼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달그락 거리며 분주한 하루를 시작하고 있음은 캐치할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밤 일이 잠깐 떠올랐다. 온라인 세미나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가 편의점에 들러 커피와 생수를 사 오다가 건물에서 마주친 어떤 분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나에게 장기 투숙인지를 묻더라. 그래서 "장기 체류까진 아니고요" 했더니, "아~ 그럼 휴가?" 이렇게 받기에 "워케이션 왔어요!"라고 속으로만 외쳤다. 워케이션이라는 단어를 모를 수도 있고... 그와 동시에 원루프제주에는 장기체류를 하시는 분들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아침에 들리는 반가운 생활소음에 "그래 제주의 일상은 이런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의 연장선으로 나는 주중 한가운데 40대 독신남의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하여 아까 같은 루틴에 대한 고민은 벗어버리고 평범한 일상에 나를 맡겨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전에 없던 상황에 일관성 있는 생활 습관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지고, 이 상황 자체를 즐기자는 마음자세로 전환이 된 것. 그때부터 새로운 일상을 받아들이고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이 2일 차 제주 워케이션의 묘미였다.

 

제주도라는 곳이 "육지 것"들에게는 여행지이자 휴가지임은 자명하다. 지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짧은 시간 안에 유명한 장소를 마음껏 탐닉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즐겨야만 온전히 제주를 경험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만큼 마음은 바쁘기 마련이고 명소와 휴가지에 천착한 나머지 나머지는 잘 안 보게 된다.

 

그런데 난, 지금 제주도에서 아침의 분주한 생활 소음을 즐기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색다른지. 그 시각의 기록에 따르면 오전 7시 13분이다. 그리하여 루틴을 수행할 생각은 접고 느긋하게 책을 읽었다. 8시 반까지 책을 읽고, 비도 오는 오늘은 어떻게 평범하게 보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9시부터 예정되어 있던 H프로젝트 작업사항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집중이 잘되는 편이었다. 비도 오니 바깥세상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도 않고 고요한 가운데 키보드 소리만이 백색소음이 되어 더더욱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줬다. 그렇게 알차게 오전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빗줄기는 조금씩 가늘어져 그치다 말다를 반복했고 하늘은 흐렸지만 맑은 공기에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날씨에 평소 같으면 점심은 걸렀을 텐데, 여긴 제주고 우중충한 느낌도 없어서 주변 탐방에 나섰다. 제주에 내려오기 전부터 우연히 고기국수에 꽂히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었고 숙소 근방에 유명한 고기국숫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꽤나 유명하고 웨이팅이 길며, 금방 문을 닫는다고 하여 그런지 확인하러 갔더니 정말 그랬다. 비도 오는데 혼자서 밖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건 탐탁지 않아, 발걸음을 돌려 눈길이 닿는 다른 고기국숫집을 찾아 나섰다.

아내와 통화를 하며 길을 걷다가 찾은 곳이 "생길국수" 이름이 왜 뜬금없지 그랬다가 자세히 보니 "좋은일이 생길국수"였다. 간판의 "좋은 일이" 너무 작아서 뜨아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들어갔다. 비 오는 날 한적하니 나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고기국수를 시키고 실내 인테리어를 둘러보고 메뉴판을 탐독했다.

핑크빛 제주도 생막걸리가 너무나도 이쁘고 맛있게 보여서 그것도 같이 주문했다. 이윽고 나온 고기국수의 뽀얀 육수는 막걸리의 우윳빛깔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여사장님의 친절한 서비스와 손 큰 주방장의 푸짐한 고기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어찌나 포근해지던지, 배부름과 낮 술의 취기를 빌어 여유롭게 동네 탐방을 마치고 편의점에 들러 커피와 생수를 사서 들어왔다. 그리고 여운이 가시기 전에 점심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오후에 A프로젝트 재개, 뭐 잠깐 만지고 나니 일도 금방 끝나버렸다. 제주에 왔는데 일이 더 손에 잡히지도 않고 평소 같으면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러시아워의 번잡함을 뚫고 집으로 향했을테지만, 이건 뭐 책상에서 일어서니 퇴근이다. 이 한가로운 시간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창밖을 보니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어제는 흐려서 보이지 않았었는데 반가웠다. 마침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는 것 같아서, 어제 빌려둔 전동 킥보드를 가지고 숙소를 나섰다.

48V짜리 힘이 좋은 녀석이었다. 안전모에 장갑까지 쓰고 바람을 가르며 바다를 향해 달렸다. 방파제에 다다르자 육지와는 다른 색깔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여객선 터미널 근처까지 찍고 되돌아 용두암을 거쳐 제주공항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날도 제법 풀려서 춥지도 않았고 그렇게 마음껏 돌고 난 뒤, 숙소로 되돌아왔다.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생선회가 문득 먹고 싶어 져 근처를 탐방하다가 지도에 나오지 않는 횟집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포장을 했다. 상호명은 "우도동굴". 노년의 부부가 운영하는 횟집이었고 동네에서 꽤 오랫동안 자리 잡고 해온 듯했다. 왜 배달어플에도 뜨지 않고 인터넷 지도 추천 맛집 등으로 소개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안에서 사장님이 회를 뜨는 동안 여사님과 도란도란 얘기를 했다. 워케이션을 왔다고 얘기했지만, 잘 모르시는 듯 했다. 경기가 예전 같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시간이 흘렀고 시대는 바뀌었지만 이 분들과 그 가게는 한참이던 시절의 부부사진에서처럼 그 시절의 전성기에서 멈춘 듯했다. 문득 지역경제 활성화에 대한 고민이 다시 스쳤다. 계속 맞딱거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워케이션은 이러한 문제를 타개할 대안으로 보고 있다. 워케이션이 아니라면 뜬금없이 연고도 없는 이런 동네에 와서 회를 포장하고 있겠는가. 워케이셔너로서 부부의 가게의 첫 손님이었던 것이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포장해서 가져온 회는 식감이 고소하고 탱글탱글 단단한 맛이었다. 완전히 제철 회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혼자서 달달한 한라산 소주 한잔과 함께  하기에 아쉬움이 없었다. 숙소에는 티브이가 있었다. 집에서도 잘 안 보는 티브이였는데, 그날 따라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그냥 연예인들이 나와 시시콜콜한 사는 얘기와 우스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프로에 불과했는데,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혼자서 멀거니 히죽거리며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노트북을 펼쳐 넣고 실시간으로 2일 차 하루를 정리했었나 보다. 위에서 쓴 글자 수만큼이나 가득한 분량으로 하루를 길게 정리하고 있었다. 워케이션 숙소의 익숙한 분위기에 비슷했던 옛 추억의 장소와 학창 시절, 여러 가지 단상을 떠올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과거를 휘적거렸다. 그렇게 이틀째 날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