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케이션에 진심인 편

원루프제주 워케이션을 다녀와서 - 3일차

데브마이너 2023. 3. 10. 17:02

3일 차쯤 되니 내가 워케이션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점차 무뎌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느 때와 다른 평범한 일상을 제주에서 맞이하였고, 그 자체에 익숙해진 듯하다. 원래 하던 아침의 루틴은 상상으로 대체하고, 대신 좀 더 향상된 루틴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시뮬레이션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음 워케이션에서는 어떻게 할지 대비책도 세워가면서 말이다. 확실히 제주는 자차를 이용하는 것이 힘들어 수반할 수 있는 짐이 한정되어 있다.(참고로 수화물 짐이 15키로 이상이면 추가 운임을 부담해야 한다.) 매트는 가볍지만 부피가 커서 가지고 다니는 건 좀 어렵지 않나 싶다. 아직까지 답이 명확하게 나오진 않았지만, 일상이 깨지는 것은 부담스럽기는 하므로 답을 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색 다르지만 평범한 일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루틴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이 홀로 임하는 워케이션이라면 컨트롤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워케이션을 다녀와서 다른 워케이셔너분들의 회고를 찾아보았다. 나와 비슷한 고민과 의미 부여 등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휴가와 일의 비중을 95:5로 잡아야 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양자택일 하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래 내가 돌아봐도 그랬던 것 같다. 가족과 함께 한 청명한 날의 삼척 워케이션은 발코니를 사이에 두고 일과 휴식의 경계 속에서 갈팡질팡 아쉬워했던가 하면, 통영에서의 워케이션은 너무 시간이 짧아 알차게 시간을 보낸 기억 속에서 일인지 휴식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일에 몰입하면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고, 이후 고개를 들어 일상을 마주했을 때 색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은 묘미가 아닐 수 없다. 그냥 일을 하면 되는 것이고 고개를 들었을 때 다른 풍광이 비치는 것에 의미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3일째 되던 날은 전날 밤 킥보드가 충전이 되지 않아 업체에 헬프를 요청했던 날이었다. 본사 서비스팀이 내가 있는 숙소로 와서 직접 교환해 주실 수도 있었지만, 운동 삼아 직접 방문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킥보드를 타고 본사를 찾아갔다. 담당자님을 만나 회사 현황도 물어보고 이브이패스 스토리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주도 한라산 중턱쯤에 있다고 해야 하나? 킥보드에 올라타고 경사진 도로를 오르는데, 잘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니 귤색 간판이 멀리서도 보였다. 큰 사거리의 한 귀퉁이에 큼직하게 자리잡은 이브이패스 건물 앞에는 서비스 트럭이 줄지어 서 있었고 막 문을 연 시점이라 바로 담당자님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궁금한 것도 물어보았다. 탄탄한 운영 인프라를 갖추고 악세서리와 굿즈샵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캐치프레이즈를 보며 구석구석을 자유로운 속도로 여행하기에는 킥보드만한 것이 없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도 워케이션 기간 내내 이용하면서도 그런 감탄을 쏟으며 워케이션과 궁합이 잘 맞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새로 받은 킥보드 장비를 받고는 테스트 겸 주변을 돌며 풍광을 잠시 즐겼다. 이브이패스 건물에서 방선문 계곡과 검은오름이 가깝게 있어서, 그 근처까지 갔다가 휘리릭 숙소로 돌아와 1리터에 가까운 커피로 갈증을 달래며 밀린 업무를 빡시게 마무리 하였다.

이내 점심시간이 되었다. 어제 갔다가 돌아선 고기국수집을 다시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도대체 얼마나 다르길래 그렇게 사람들이 문전성시인 건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름하야 "효퇴국수".

 

적당히 붐비지 않을 시간을 노려 갔는데도 웨이팅이 있었다.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고 순번을 기다려 홀에 들어섰다. 본의 아니게 식당 한가운데 4인석 테이블을 홀로 차지하게 되었다. 가게에서는 합석을 강요하지도 않고 그냥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주문한 고기국수가 나왔고 육수는 어제의 "좋은일이 생길국수"의 육수보다 맑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맛은 진했다. 면도 노란색 중면 같았는데 약간 꼬들꼬들 탱글탱글한 식감이 느껴졌다. 기다리면서 조리하는 주방의 모습이 보였는데, 면을 오래도록 치대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것이 비법이 아닌가 싶었다. 고기의 풍미와 식감도  달랐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진한 육수만큼이나 고기 향도 진하게 느껴지고 부드러웠다. 인터넷상의 별점 리뷰는 각각이었지만, 내 기준에서는 만족스러웠다. 어제의 지역 식당과는 다른 느낌. 그래서 맛집이라고 하는구나를 느꼈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이를 계기로 다른 유명한 고기국숫집도 방문하여 재차 확인했는데, 고기국수만큼은 이곳이 나한테는 좋았다.

 

 

여전히 날씨는 흐렸고 이제는 익숙한 동네를 잠깐 돌아보곤 돌아와서 내내 업무에 집중했다. 새삼 날씨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날씨가 흐리니 그다지 바깥에 나서고 싶지 않았고 일하는데 방해가 되지도 않았다. 다른 장소에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워케이션에 완벽히 적응한 느낌이 들었다.

 

일이 끝나고선 자유로움과 함께 외로움이 잠시 잠깐 찾아들었다. 내 나이 때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 몇몇이 문득 생각났다. 일말의 동질감 같은 것이었나? 안부나 전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워케이션의 또 하나의 허들, 먹고 사는 문제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지에서 먹는 것을 스스로 찾아 해결해야 한다는 것.

 

숙소에 조리할 수 있는 도구와 식기가 비치되어 있었지만, 귀차니즘에 내키지 않았다. 매 점심때마다 고기 국수를 먹었고, 저녁은 포장을 해오거나 주전부리로 때웠던 상황. 오늘은 평소에 안 하던 배달을 시켜 먹기로 했다. 좀 이른 저녁시간이었고 중식을 시켰다. 제주도라 좀 다를 거라 기대했는데, 동네 중국집은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좀 아쉬웠지만 허기짐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했다.

 

생각보다 긴 저녁 한나절, 3일 때 되던 그날은 본래의 나를 잊고 다른 세상을 사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나보다. 그날의 기록을 다시 한번 끄집어내 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워케이션은 내겐 하나의 리추얼과도 같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기를 때로는 전혀 다른 삶을 잠깐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를테면, 어느 정도의 일상적인 삶과 직장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피한 만큼. 그러한 삶을 저버리는 것은 일탈에 가까울 테지만, 나의 선택에 따라 잠시 다른 삶을 살아보는 건 가능하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소위 내 삶을 뒤로하고 자연인에 입문하기에는 엄청난 고민과 희생이 뒤따르지만, 이건 그저, 장소만 바꿔서 살아볼 뿐이다. 물론, 아내와 자녀가 있는 40대 가장이 가지는 판타지 정도에 국한된 얘기일 수도 있다. 주변의 독신인 친구들 입장에서는 별 다른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워케이션의 다양성과 그 각각이 가지는 의미와 색채를 계속해서 탐색하고 발견하는 중이다. 일단 이곳은 나를 불러 세우거나 뒤돌아보게 만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곳에서 나는 그저 타자 중 하나로 간주되며 나머지 타자들과 섞여 서로에게 어떠한 감흥도 교감도 하지 않는 채로 살고 있다.

이것은 나 스스로를 향한 집중과 사색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그 수준도 상중하로 나뉠 수 있다. 온전하게 지내고자 한다면 술을 멀리 하라. 어쨌든 만족스럽지 않은 오늘 마지막 한 끼를 허기에 의지해 달래고 이제 글을 다시 쓰는 중이다.

계속해서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들.. 하나라도 더 부여잡고, 그 깊은 색채와 오묘함을 계속 만끽하고 싶다.